[기획] 홍주 1000년 지명 유래를 찾아 2
[기획] 홍주 1000년 지명 유래를 찾아 2
  • 송경화 기자
  • 승인 2018.08.07 22:3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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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 지명의 역사적 조명
홍주읍성

[굿뉴스365] 홍주 지명 되찾기 운동이 시작된 지 2년여 만인 2018년이 홍주 지명 1000년으로 비정되었다.

역사서에 홍주란 이름이 처음 나온 것을 고려 현종 9년(1018)으로 보기 때문이다.

당시 고려는 거란의 2차 침입(1010)으로 인해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을 하는 수난을 겪은 후 지방행정제도 변혁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현종은 앞서 성종 2년(983)에 마련된 12목(牧)체계와 10도제(성종 14년 995)가 절도사를 중심으로 한 군역체제로 몽진 길에 올랐다가 여러 차례 험난한 상황에 처한 바 있다.

이후 군현제를 중심으로 한 지방행정제도의 변혁을 통해 중앙집권국가의 변모를 갖출 요량으로 지방행정 체제를 2원적으로 변모시켰다. 이것이 고려시대 지방행정의 근간이 된 오도양계제(五道兩界制)이다. 홍주 지명 되찾기 천년을 맞아 홍주지역의 지명 연원에 대해 고찰코차 한다. / 편집자 주

글 싣는 순서

1. 홍주 지명의 기원

2. 홍주 지명의 역사적 조명

3. 홍주와 인근 지명의 변천사

4. 홍주 지명 되찾기의 의미


2. 홍주 지명의 역사적 조명

홍주지역은 후삼국 시대의 통일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이 지역은 당시 운주라는 명칭으로 불렸다. (운주 명칭 유래는 1편에서 기술)

후삼국 초기 후백제에 속해 있던 이 지역은 905년 경 웅주장군이던 홍기(弘奇)가 궁예(弓裔)에게 내항해 이 지역이 궁예 세력에 넘어갔다. 웅주(熊州, 공주)보다 북쪽에 있던 운주(運州, 홍주)는 이때 혹은 그 이전에 궁예의 세력에 속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궁예에 속해 있던 운주지역은 궁예로부터 왕건(王建)에게 정권이 넘어가며 고려가 건국될 무렵 혼란 속에서 후백제가 강성해지며 백제의 지배 지역이 되었다.

이 지역이 백제로 다시 넘어간 이유는 왕건 추대과정에서 공을 세웠던 마군장군 환선길의 반란에서 기인한다. 환선길(桓宣吉)의 반란은 곧 진압됐지만 당시 환선길(?~918)의 처남으로 추정되는 웅주 장군 이흔암(伊昕巖)이 군사를 버리고 동태를 살피고자 중앙으로 올라갔다가 그 역시 반역죄로 처단되니 웅주와 운주 지역에 남아있던 세력이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며 지역의 지배권도 후백제의 영역이 되었다.

고려사 권1, 태조세가에는 태조 원년 8월 계해일에 웅주, 운주 등 10여현이 배반하여 백제에 붙었으므로 전 시중 김행도(金行濤)에게 명하여 동남도초토사·지아주제군사(東南道招討使․知牙州諸軍事)로 삼았다고 전한다. 아주는 지금의 아산이다.

이후 10년간 백제 소속이던 운주는 927년 3월 왕건이 직접 군사를 몰아 이 지역의 평정에 나섰고 당시 운주성주였던 긍준(兢俊)이 맞서 싸웠으나 패하여 다시 왕건의 지배지역으로 변했다. 이때 고려는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인 대량성(경북 합천)을 점령하고 후백제 장군 추허조(鄒許祖)를 사로잡았으며 이어 육로를 통해 강주(경남 진주)까지 이르렀다.

하지만 운주 점령이후 얼마 되지 않아 운주는 다시 후백제의 세력권으로 넘어갔다. 아직까지 사료에는 긍준과의 싸움이후 어느 시기에 어떤 방법으로 후백제가 다시 운주를 탈환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기록상으로 고려가 후백제와의 전투에서 연승을 거두다가 크게 패하여 상당한 군사력을 상실한 공산 전투(927년 대구 팔공산) 직후로 추정된다. 후백제가 공산전투 이후 대대적인 반격을 개시해 대목군(경북 칠곡), 벽진군(경북 성주)을 침략했다.

또한 견훤(甄萱)은 이듬해 대량성(경남 합천)을 장악하고 강주(경남 진주)를 차지해 둘째 아들인 양검(良劍)을 강주도독에 임명한다. 이 과정에서 운주는 다시 후백제로 넘어 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충청남도지에서는 태조 15년(932년)으로 추측해 향후 이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이후 왕건은 운주지역의 재탈환을 위해 태조 11년 4월에 운주 옥산에 성을 쌓고 군사를 주둔시켰으며 탕정에도 우장군 유금필(庾黔弼)을 보내 축성했다.

그 이듬해 천안에 도독부를 설치(930)하고 군사를 조련한 고려는 태조 17년(934) 5월 예산에 왕건이 직접 내려와 이 지역의 호족들에게 배신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조서를 발표하는 등 사전 정지 작업을 거쳐 9월 견훤과 왕건이 운주에서 직접 조우하여 왕건이 크게 이겼다.

이 전투 결과 웅주 인근의 30여 군현이 고려로 귀속됐다.

또한 견훤은 이 전투의 여파로 금산사에 유폐되고 이후 탈출해 고려에 귀부한다.

결국 934년에 있었던 운주 전투는 고려가 통일을 하는 시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전투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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